아주, 아주 오래전, 이란을 지배하는 「뱀의 왕」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 왕의 이름은 자학(Zahhak), 원래는 접경지 부족의 한 왕자였습니다. 자학은 왜소하고, 약하며, 경박한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래도 그의 마음에는 선량함과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냥을 하던 중, 계곡 밑으로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계곡 바닥에서 스스로를 「잔의 뱀」이라 부르는 마녀를 만나게 되었죠.

역자 주:

잔의 뱀은, 일어판 비주얼 노벨 원문에서, 「杯蛇」(はいへび, 하이헤비)로 쓰여 있으며, 이는 게임상에 등장하는 그레이 서펜트의 일어판 이름, 「灰蛇」(はいへび)와 발음이 같다.

얘기에 따르면, 마녀는 왕자의 두 어깨에 입을 맞추었고, 이에 왕자의 부러진 다리는 다시 나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전보다도 훨씬 강해졌다고 합니다. 왕자는 마녀에게 매우 감사해하며, 답례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었죠. 그러자 「잔의 뱀」은 담담히 웃으며 작별을 고할 뿐이었습니다. 「미래에 만민의 왕이 될 자여, 그대는 이미 충분한 답례를 해주었다. 그대의 운명은 이미 범인을 초월해,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당시, 자학은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여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계곡을 빠져나간 후, 그는 밤이 되기 전에 이 기적을 부왕께 알리고 싶어 서둘러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부왕, 연로한 마르다스는 매일 밤 왕궁의 화원을 홀로 걷곤 했습니다. 왕자가 기뻐하며 화원에 들어왔을 때도, 그는 꽃과 함께 달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아들아……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는 거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구나.」 노왕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자학은, 왕관을 쓰고 홀을 들고 있는 아버지를 보자, 무슨 일인지 뭔가 이상한 공복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두 어깨로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가 간지러운 곳을 세게 긁자, 갑자기—— ——한 쌍의 뱀 머리가 양쪽 어깨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당황한 왕자가 반응할 틈도 없이, 뱀의 머리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노왕의 목을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자학은 엄청난 충격에 빠져, 곡도를 꺼내, 눈을 감고 두 뱀을 향해 내려쳤습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새로운 한쌍의 뱀의 머리가 다시 그의 양 어깨에서 자라나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 와중, 뱀독이 퍼진 노왕은 바닥에 쓰러진 채, 입에는 거품을 물으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자학은 더 이상 그 공복감을 참지 못하여, 곡도로 노왕의 머리를 내려쳤고, 어깨의 뱀들로 하여금 그의 부친의 뇌를 먹게 하였습니다. ……그 시간부로, 그는 공포의 「뱀의 왕」이 되었습니다. 바로 다음날부터, 자학은 매일 밤 강한 힘을 가진 범죄자를 찾으러 다녔습니다, 어깨 위의 뱀들이 계속해서 인간의 뇌를 즐길 수 있도록. 곧, 자학이 있는 부족에 더 이상 범죄자가 남아있지 않게 되자, 더 큰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해, 주변 부족에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을 정복하고, 심판하며—— ——당연하다는 듯, 그 정복당한 「극악무도한 악인」들의 머리를 베어갔습니다. 더 이상 「뱀의 왕」은 오래전 사냥 중에 길을 잃은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손아귀는 너무나도 강력한 나머지 적을 둘로 쪼개버릴 수 있었고, 그의 피부는 날붙이로도 찌르는 게 불가능한 단단한 비늘이 자라나, 화가 난 소를 데려와도 그를 다치게 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게 「뱀의 왕」의 군대는 계속해서 승리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는 접경의 부족들을 통일한 것뿐만 아니라, 중앙의 왕조마저 무너뜨려 세계의 주인, 즉 「만왕의 왕」이라는 칭호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 이후, 「만왕의 왕」은 자신이 정복한 영토에 혹독한 형법을 도입하였죠—— ——물론,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처형해, 걱정 없이 신선한 뇌를 계속해서 즐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수백 년이 흘렀습니다. 「뱀의 왕」은 늙기 시작했고, 그의 법률과 정치적 수완은 더 이상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의 성격은 더욱더 비이성적이고 난폭해져 갔습니다—— ——결국, 그에 대항하는 영웅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영웅은 자학에 맞서려는 이들을 이끌어 그를 쓰러뜨리는데, 뜻밖에도 그가 불사의 몸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는 자학의 머리를 베었지만—— ——한 쌍의 뱀의 머리는 여전히 그의 몸을 조종하며 저항을 이어나갔습니다. 괘씸한 폭도 놈들…… 그 오랜 세월을 걸쳐, 국가를 통일해, 적들을 소멸시키고, 도적들을 모조리 죽여오며, 탐관오리들까지 계속해서 처형해왔건만…… 너희들에겐, 이것이 그에 대한 「보답」이더냐? 너희들의 조상에게 물어보거라, 왜 그들이 「뱀의 왕」에게 만세를 외쳤는지! 그때, 자신을 「잔의 뱀」이라 불렀던 마녀가 갑자기 모두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 불쌍한 왕 자학이여.」 마녀는 슬프다는 듯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이런 안타까운 모습이 되었구나.」 인간은 무언가를 극복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 무언가는, 극복하고 나면 그저 우스워 보일 존재이며, 동시에 그대를 부끄럽게 만들 존재이기도 하다. 벌레에 불과했던 그대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줬건만,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결국 그대의 마음은 다시 벌레에게 침식당해버리고 말았다. 봉기군 여러분, 그대들도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의 몸은 결코 그 자신의 영혼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본능은 도저히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는 도랑에 흐르는 물과 같지만—— ——오직 바다, 모든 강과 호수를 뛰어넘는 바다만이, 이러한 더러움을 오염되는 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불쌍한 왕 자학이여, 나는 그대에게 「인류」을 초월할 기회를 주었건만, 그대는 결국 그 기회를 자신의 영혼을 부숴버리는데 쓰고 말았다. 육체를 경멸하는 그대의 영혼을 통해, 본능이라는 족쇄를 벗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하지만 그대가 더 노력할수록 그대의 몸은 여위고, 흉측하게 변해갔고, 그대의 영혼은 이의 열 배나 더 약하고 추악해지고 말았다. 사실상, 그대는 이미 자신의 영혼까지 굶겨 죽여버리고 만 것이다. 불쌍한 왕 자학이여, 그대의 영혼은 언제나 그 육체를 이해하길 거부했고, 결국 그대의 육체는 짐승의 것과도 같은 욕망의 심연에 빠지고 말았다. 애초에 그대의 어깨에 있는 뱀들은 뇌를 필요로 한 적이 없다. 그들은 그저 그대가 빠르게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왔을 뿐이니.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어떤 뇌를 삼키든, 거기엔 무언가의 지혜가 담겨있고, 이는 그대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그대는 강력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고, 그렇기에 그대는 탁월한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분명 나는 그대를 「미래의 만인의 왕」이라 불렀지만, 이에 대한 그대의 이해가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얕았다는 걸 직접 목격하게 되니, 그저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 두 마리의 뱀은 그저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도왔을 뿐이니. 오만한 왕 자학이여,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거래와도 같다만, 그대는 자신이 뭘 거래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대에게 범인을 초월할 가능성을 주었지만, 그대는 그저 「소꿉장난」에 낭비해버리고 말았다. 자학이여, 그대에겐 더 이상 「인류를 초월할」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다. 이제, 거래를 끝낼 시간이다. ……그대는 희귀한 표본이긴 하였다. 다만 나의 주인님이 기대하던 「초월자」는 아니었다. 말을 마친 후, 신비로운 분위기의 마녀는 다트를 던졌고, 이는 곧 자학의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러자 한때 「만왕의 왕」이었던 이는 무겁게 바닥에 쓰러졌고, 두 마리의 뱀 또한 빠르게 여위어가며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녀는 당황해하는 민중들 앞에서, 여유롭게 그 「제물」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제 아버지께서 해주신 「뱀의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15세가 되기 전까지, 저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허무맹랑한 전설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텔, 갑작스럽게 됐지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전세가 참담하게 바뀌어가고 있단다…… 샤카족의 기습에 폐하의 친위 부대인 「추종자」를 전멸해버리고 말았다는구나. 폐하 역시 무사하시긴 어렵겠지.

주:

불멸자 (Ἀθάνατοι)——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Ἡρόδοτος, 기원전484~425년) 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앙 친위군에게 붙인 호칭이다.

헤로도토스는 중장보병으로 구성된 이들이 항상 일만 명이란 숫자를 유지하는 걸 보고, 「불멸자」라고 묘사하였다. 이 부대는, 그가 말하길, 어느 병사든 죽거나 심각한 부상 혹은 질병을 얻게 되면, 즉시 새로운 병사로 교체된다고 하였다.

페르시아의 기록에도 이 정예부대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들은 「불멸자」가 아닌, 「추종자」라 불려졌다. 어쩌면 헤르도토스, 혹은 그의 정보원이 페르시아 고대어의 「Anûšiya」(「추종자」)와 「Anauša」(「불멸자」)를 혼동하여 임의로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 군의 수장이 부재중이고, 캄비세스 왕자도 저 멀리 바빌로니아에 있으니, 대사제인 내가 당장 전선으로 달려나가, 행방불명된 폐하를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할 수밖에 없구나. 분명 결말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너에게 이 두 가지 물건을 주려고 한다. 상황이 정말로 심각해졌을 때, 이것들이 너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약이 담겨있는 병이다. 만약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된다면, 아래의 마개를 벗기고, 바늘을 피부 위로 찔러라. 이걸 사용하면, 한때 「뱀의 왕」이 가졌던 그 힘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뱀의 왕」? 그래, 「뱀의 왕」. 그 전설은 순전히 시인들의 허구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단다. 나와 폐하 역시 그 「잔의 뱀」과 만난 적이 있었지. 이 약병은 그녀에게서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나도 이 힘이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단다. 이론상으로는 「초월자」가 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겠지만——그중에 최악의 방법이겠지. 이 두 번째 물건을 준비해둔 건 바로 그 때문이란다. 이것은 고대 문명이 남긴 전송 장치이다. 이걸 사용한다면, 네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삶이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얘기이신가요? 에스텔…… 난 너의 친부가 아니란다. 너를 낳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실제론 존재하지 않지…… 너를 처음 본 건, 우리가 「잔의 뱀」의 소굴에 들어갔을 때였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세요? 오래전, 폐하께선 그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왕자에 불과했고, 나 역시도 그저 이름 없는 학자에 불과했단다. 모험을 하던 중, 우리는 그 전설적인 마녀——「잔의 뱀」의 흔적을 발견하였지.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는 그 마녀의 추종자로 위장해, 그녀를 만났고, 기회를 노려 그녀를 암살했다. 「잔의 뱀」의 소굴은 수많은 마법 장치들이 가득했단다——그중에 지금의 너를 태어나게 한 장치도 있었지. ……장치에서요? 그렇다는 건, 전 인조인간이라는 건가요? 거기까진 나도 잘 알지 못한다. 그 장치는 매우 특별해서——당시엔 거기에 쓰인 글을 전혀 읽을 수 없었지만——분명 이것이 어떠한 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알 수 있었지. 나는 폐하와는 다르게, 「왕자로서 세상 구경을 해야 한다」 같은 의무가 없었기에, 나는 「잔의 뱀」을 암살한 후, 그녀의 소굴에서 그녀가 남긴 마법들의 원리를 깨우치는데 나의 모든 걸 쏟아부었지. ……그렇게 20년이나 흐르고 말았다. 「잔의 뱀」이 남긴 마법들은 정말로 대단했지만, 나는 몇 가지 구절만 겨우 해독했을 뿐, 나머지 마법의 단어들은 전혀 해독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 생애를 여기서 마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 곳을 떠나려 결심한 순간—— 어느 이른 여름의 저녁, 너에게 생명을 준 그 장치가 오랜 세월의 기다림 끝에 갑자기 멈춰 섰지. 연꽃잎이 펼쳐지듯 장치가 열리더니, 시원한 기운이 발 위로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너, 에스텔이 그 꽃잎 속에서 태어났단다. 자라나는 너는 내게 새로운 인생을 안겨주었다. 또한 「마법」과 「신」이라는 신비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 너는 「잔의 뱀」이 그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기계를 사용해, 어느 시간의 파편에서 훔쳐 온 아이인 것 같았다. 현세의 마녀와 구세대의 현자——그들이 쓴 언어를, 넌 태어났을 때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너의 아버지라는 자는, 「깨달음」을 얻어, 종교를 창시한 게 아니다. 네 아비는, 네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을 때, 너를 통해 그들이 남긴 걸 번역하며 배웠을 뿐이야. 단지 그뿐이다. 너의 탄생으로 인해, 우리는 고대 문명이 남긴 불멸의 정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 너의 탄생으로 인해, 우리는 「초월자」에 대한 개념과 그 가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너의 탄생으로 인해, 우리는 대립하는 두 명의 신이 무엇을 위해 서로 다투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에스텔, 별의 아이야…… 너는, 이 모자란 아버지가 보기에 분명 틀림없는 「신의 자식」이다. 이제 그 사악한 샤카족이 우리를 죽이러 오겠지만, 너만은 반드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다시 말하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니 다른 누구나,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라. 이 「게니우스」라는 전송 장치를 쓰면 시공간을 뛰어넘어 「신비의 바다」를 건너게 해, 「광명의 세계」에 이르도록 해줄 거라 믿는다. 너는 원래부터 그곳에 속해있던 존재이니 말이다.
「게니우스」? 그거—— ——대사제님, 그렇다는 말은, 당신은 「원래부터」 이 세계의 주민이었다는 말인가요? ……아뇨, 그건 그저 제 아버님의 바람에 불과했어요. 샤카족의 공격이 성까지 이르렀을 때, 저는 파괴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폐기하고, 「게니우스」를 작동시켰죠. 눈앞의 세계는 빠르게 뒤틀려가며, 저는 아버님이 말씀하신 「광명의 세계」에 이르길 기대했지만—— ——거기서 절 기다리고 있던 건, 그저 허무의 심연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하늘의 균열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속삭임이 들렸습니다. 아무리 입을 굳게 닫아도, 입안이 녹이 슨 쇳가루로 가득 찬 듯, 씁쓸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무리 숨을 참아도, 목 속에선 불길과 짙은 연기가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습니다. 서둘러 독말풀을 삼켰지만, 손끝이 불에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심연의 밖이라면 찰나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심연 속에 떨어진 저에겐 마치 수천 년이 지나간 듯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이곳에서, 아무런 이정표도, 나침반도 없이, 그저 자아가 산산조각 난 채 공허를 떠돌 뿐이었습니다. 육체, 영혼, 신경, 두뇌, 혈액, 심장—— 신체의 모든 곳으로부터 느껴지는 고통에, 제 몸은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결코 「광명의 세계」라 부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영원, 영겁에 걸친 각각의 순간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모든 고통들이 익숙해져왔을 때, 저의 삼위일체가 다시 저의 자아를 회복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이 갈라진 틈새, 이 끝없는 심연과 영원한 순환의 본모습을 똑똑히 목격하였습니다. 눈으로 본 진실이 아닌 마음으로 본 진실로서. 그것은 바로 광명의 신으로부터 버려진 방정식, 바로 마귀의 심장이었습니다. 네, 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한밤중의 산들바람이 느껴지는군요, 모두들 이미 깊은 꿈에 빠지셨겠죠.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원망도 없이, 영혼들이여, 내가 너희 몸의 사사로운 치욕과 부덕함을 씻어내리니, 너희 모두가 태양 아래에서 다시 한번 찬란한 빛을 쐴 수 있도록 하리라. ——와서 나와 함께하거라, 죽음으로 나와 한 몸이 되고, 나의 영혼 속에 잠들어라. 이 무한과 허무를 떠도는 껍데기 속에선, 오직 「하나」의 초월자만이 필요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