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면이 갈라진 틈에 쓰러져 있다. 몸을 비틀어, 겨우겨우 일어난다. 시선을 왼쪽으로 옮기자, 슈프레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주:

슈프레 강(Spree)은 체코에서 발원하여, 독일 수도 베를린을 지나 엘베 강과 합류해, 북해로 흘러 나간다.

p.s. 냉전 도중, 슈프레 강과 하펠 강(Havel)의 강변은 「베를린 장벽」의 몇 안 되는 막히지 않은 곳들 중 하나였다.

당신은, 강 너머를 바라본다. 브란덴부르크 문 남쪽을——

주: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베를린 시의 중심에 위치하며, 베를린의 상징이 되고 있다. 7년 전쟁(1754-1763)에서 프로이센의 기적 같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대왕"의 명에 따라 세워졌다.

p.s. 냉전 도중,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 장벽」의 일부가 돼, 동독 국경부대 이외엔 접근할 수 없었다.

불길은 검은 연기를 만들어내며, 피에 적셔진 검은 진흙처럼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1952년의 1월 1일. 시각은 정오 정각. 구름에 뒤덮인 하늘 아래, 사신(死神)이 베를린에 내려오려 한다.
거리는 기왓조각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건물과 차는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계속해서 검은 연기에 삼켜졌다, 토해지고 있었다. 이따금씩 아른거리는 불길은 마치 과격한 춤을 추듯, 하늘 높이 확 치솟는 듯하더니, 이내 지면으로 갑자기 떨어진다. 다음 순간, 네모난 무언가가 폭발에 의해 하늘로 날아가다, 격한 소리를 내며 당신의 앞에 떨어졌다. 그것은 뒤집힌 T-54, 점령군 최강의 전차 중 하나였다.

주:

「T-54」(이 「T」는 키릴 문자이고 「te」로 읽는다)는 소련이 설계한 중형전차. 1947년부터 양산이 개시되었다. 이후, T-54와 그 자매형 T-55는 순식간에 바르샤바 조약기구 각국의 주력전차가 됐다.

또한 다수의 국가로 수입되어, 20세기 후반에 발생한 거의 모든 무장 충돌에 사용되고 있다. T-54/55는 역사상 가장 많이 만들어진 전차로 알려져 있으며, 그 수는 10만 대에 이를지도 모른다.

당신은 마음속의 무언가가 마비된 듯, 앞으로 계속 걸어간다. 눈에 비치는 한,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무 말뚝이 달린 철조망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것은 점령 구역을 나누고 있던 울타리였다——

주: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연합군은 독일을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이 각각 관리하는 4개 점령구역으로 나눴다. 점령구역 내에서는 민주화, 비군사화, 비나치화가 진행됐다.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은 점령구역을 통틀어 「서베를린」이라 칭했고, 동독이 쌓은 「베를린 장벽」에 의해 빙 둘러 싸여, 서쪽 진영이 동쪽 진영 안에 있는 외딴 섬과 같은 존재가 됐다.

이제 생명체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울타리로 나눌 필요도 없다. 부러진 ■■가 옷가지를 뚫고 나와, 하얗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칠흑같이 어둡게 굳어가는 ■■이 셔츠 밑으로 흘러내려오고 있다. 파리들조차 꺼릴듯하다. 7년 전 4월 말의 베를린과 비교해도, 오늘처럼 이렇게 생기가 없지는 않았다.

주:

베를린 공방전(1945년 4월 16일-1945년 5월 2일)은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에서 마지막이 되는 중요한 전투이다. 소련-폴란드 연합군의 사상자는 36만여 명, 독일군의 사상자는 31만여 명. 그에 더해 48만여 명 이상이 투항하거나 포로가 됐다.

4월 30일 21시 50분, 붉은 군대는 승리의 깃발을 베를린의 국가의회 의사당 꼭대기에 내걸었다. 이는 나치가 완전히 패했음을 보여줬다.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했고, 유럽의 싸움은 종식을 고했다.

전쟁이 만들어낸 것이 인간 세상의 지옥이라면……. 지금의 베를린은 떠도는 유령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덤이다.
당신은 마음속의 무언가가 마비된 듯, 오로지 앞으로만 계속 걸어간다. 시야의 끝에, 한 줌의 생명이 눈에 비친 것 같았다. 「구세주가 있길 바라는가?」 ——당신은 목구멍 속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느낀다. 「아아, 물론! 물론이고 말고!」 ——연기처럼 일어나는 먼지와 검은 진흙 속에서 반짝이는 눈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려 할 때—— 당신은 문득 깨닫는다. 그들의 벌어진 동공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죽음과 동화되어버린 남겨진 것에 불과하다. "구세주" 당신은 이 미덥잖은 말이 격렬하게 불타올라, 얼어붙은 대지로부터 시작해 높은 하늘을 향해 깊숙하게 찌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이성을 잃고, 오직 이 단어의 의미를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이내 벽이 그 앞길을 막는다. 얼음처럼 차가운 벽이 모든 길을 가로막고 있다. 크게 하얀 입김을 내뱉은 당신은, 그곳에서 지옥보다 더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된다. 울타리도 초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한층 한층 빈틈없이 쌓아 올려진 차갑게 굳은 ■■밖에 없다. ■■ 위에는 희미하게 서리가 내려 있다. 그것은 마치 방금 사 온 아이스크림처럼 반짝이며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다. 폭발하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뼛속까지 차가워지는 듯한 불꽃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을 뿐이다. 시선을 멀리하자, 몇 km 떨어진 곳에서 겁에 질려 서두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단체의 유도로, 점령군이 긴장을 유지한 채 흩어져 간다——아니, 어쩌면 점령군이 사람들의 피난을 유도하고 있는 건가? 시 중심부로 이어지는 도로는 모두 바리케이드로 봉쇄돼 있다. 바리케이드는 다양한 자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정도에서는 군용 모래주머니, 가로등 기둥, 발코니 난간, 기계 부품, T자형 철골, 뒤틀린 자동차와 전차, 그리고, 울타리에서 벗겨진 철조망. 그 바리케이드 위에는, 여러 구의 ■■한 ■■가 매달려 있다. ■■는 두 팔을 펼쳐 양손을 벌리고 있었다. 마치, 그 뻣뻣이 굳어버린 ■■로 무언가를 지키려 하는 것처럼.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당신의 발밑에는 잿더미밖에 없다고. 그래도 당신은 포기하지 않는다. 「구세주」라는 허상 아래, 열심히 생각의 파편을 주워다 모으고 있다. 당신은 그녀들의 이름을 모른다. 당신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라, 명백히 지구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생물들이 주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당신은 단지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줍고 있을 뿐. 그리고, 당신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생각을 너의 영혼 속에 새겨줘.」 마치, 그것만이 모든 것의 구원인 것처럼. 마치, 당신 자신만이 유일한 「구세주」인 것처럼. 당신은, 지면이 갈라진 틈에 누워있다. 녹초가 되어 있다. 피로는 절정에 달해, 사고를 포기한 머리는 말끔히 비워지고 있다. 너무 지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당신은 ■■가 아니라면 ■■도 아니다. 더구나 ■■■도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완전히 지쳐있다. 피로가 당신 몸속의 모든 세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의식도……점점 유지하기 어렵게 되어 간다. 긴 잠에 빠지기 전의 졸음 속에서—— 당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확신하기 시작한다. 실은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단지……과거에 있었던 일인지, 현재의 일인지, 아니면 미래에 일어날 일일지는 알 수 없다. 나비 한 마리가 당신의 손가락 끝에 추락하며 내려왔다. 당신은, 그 나비의 날개를 고쳐주겠지. ……. 일어났나요? 악몽이라도 꿨는지, 심하게 가위눌린 것 같네요. ……. (나는 차 안에 있는 거 같다…….) (그녀의 무릎 위에 누워있다…….) (테슬라가……운전하고 있는 건가…….) ——윽, 내가 뭘 한 거지? 설마 「신의 열쇠」의 영향인가? 아뇨……아마도……「신의 열쇠」와는 상관없을 겁니다. 당신이 쓰러지게 된 건 아마도, 자연재해 탓일 거예요. 자연재해? 당신이 기절할 때,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 지진? 내가 그걸로 다치기라도 한 거야? 아뇨, 당신이 상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흔들림은 그리 크지 않았어요. 보스턴에서도 부상자는 없을 겁니다. 그럼……. 에이다의 여진 모니터링에 따르면, 진원지는 뉴욕 시가지, 맨해튼 일대일 겁니다. 맨해튼? 거기라면……. 예……에디슨 일행이 실험을 하고 있던 곳입니다. 하지만……. ……제일 걱정되는 건 그게 아닙니다. 당신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에이다가 잠깐 동안, 고장이 났습니다. 그녀의 자가 검사 결과, 고주파 펄스 에너지에 의해 이상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펄스……에너지? 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자기 펄스……. 하지만 낯설고, 두려운 종류……. ……붕괴 펄스. 뭣…….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면……베를린에서 일어난 일이 뉴욕에서 또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1955년 11월 24일, 새벽 4시경. 국도 제1호선, 로드아일랜드주와 매사추세츠주의 경계를 흐르는 블랙스톤 강변.

주:

미국 국도 제1호선(U.S. Route 1), 남쪽은 플로리다주의 키웨스트(Key West, 미국 본토 최남단 거리. 강 건너 쿠바의 아바나까지 불과 171km) 해안, 북쪽으로는 메인 주의 포트 켄트(Fort Kent)와 캐나다의 뉴브런즈윅주의 제161호선(New Brunswick Route 161, 약칭 NB-161)과 연결돼 있다. 길이 3846km. 미국 동해 기슭 15개 주를 잇는 주요 도로 중 하나. 1957년부터 국도 제 1호선의 기능은 새로 만들어진 주간고속도로 제95호선(Interstate 95, 약칭 I-95)으로 서서히 대체되고 있었다.

본명 프레데리카 니콜라 테슬라라는 42실험실의 연구원은, 온 신경을 집중시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의식을 차량 운전 하나만 집중시키지 않으면, 무릎베개가 눈에 띄어, 마음이 흐트러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잉여 인간 녀석이 잠에서 깨어나면……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해달라 하자. 하지만, 붕괴 펄스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는 건……웰트 녀석의 몸이 불안정해졌다는 건가. ……아니,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냐. 이어폰에서는, 에이다가 계속해서 통화를 시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아까의 전자기 펄스 때문에, 각종 번호가 모두 통신 불가능한 상태로 되어 버렸을 것이다.

주:

전자기 펄스의 영향범위 내에서는, 전력시스템, 전자기기, 집적회로 등 보호받지 않은 전자기기, 또는 전선에 연결된 것은 모두 복구불능 수준의 손상을 받는다. 트랜지스터에 비해, 전자관(진공관)은 전자펄스에 피해를 입기 어렵다——단, 이것도 전자관에만 해당된다.

에이다와 연결하기 위해 특별한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 WS No.88도 전자기 펄스에 의해 쇼트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보의 마비는, 사회의 마비를 의미한다. 설마, 나보고 이대로 영문도 모른 채 뉴욕까지 운전하라는 거야? 제발, 어디든 연락이 됐으면—— 여, 여긴 긴급대응관리국, 프로비던스 특별연락사무소! 어디 소속이십니까? ——설마, 진짜로 연결되다니.
이쪽은……천명기관 직속, 제국연구원 42실험실. 아인슈타인 박사와 테슬라 박사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들어본 적이 없을 리가요! 대단해요, 이제야 의지할 만한 사람과 연락이 닿았네요! 전화 너머에서 청년은 감동한 나머지 큰 소리로 외쳤고, 이어 연신 사과해왔다. 죄, 죄송합니다……제 이름은 유리 암스트롱, 오늘 야간 당직이었습니다. 갑자기, 지진인지 정전인지, 전화도 연결이 안 되고……그래서 벨이 울리자 너무 감동한 나머지……. 아, 맞아요……두 분 다 「긴급 연락 리스트」에 성함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 뵌 적은 없어도, 두 분의 성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긴급 연락 리스트」? 뭐야 그건? 정부와 천명 기관 북미 지부가 공동으로 작성한 연락 목록입니다. 유사시에도 긴급대응관리국의 지휘계통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두 분의 성함은 각각 12번째와 13번째에 있습니다……아,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찌됐든, 보다 고위 지휘자와 연락이 되지 않는 지금……저, 그리고 프로비던스 관리국 전원은……. ……완전히 두 분의 지휘하에 들어갑니다. 잠깐, 잠깐……너희들 정부기관이지? 우리의 지휘하에 들어온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무슨 말이냐고 물으셔도……. 규정상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저희 특별연락사무소는, 에디슨 씨의 제안을 받아 대통령께서 서명하신 특별 조례에 따라 운영되고 있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목록의 1번째는 대통령 각하, 2번째는 에디슨 씨, 3번째는 플랑크 씨, 4번째는—— 이제 됐어. 대충 알았으니까. 둥지 머리, 사람들이 네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 테슬라, 그의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괜찮은가요? 정부기관과의 대화라니 귀찮아……. 게다가, 더 이상 뭘 설명해 달라고 해. 네 순위가 나보다 높으니까—— 잠깐만요——테슬라 박사님, 아인슈타인 박사님과 이야기하고 계십니까? 당연하지. 달리 누가 있어? 진짜 시끄럽네! 그녀가 12번, 내가 13번, 당신네들은 그녀에게 지시받으면 그걸로 되잖아——뭐 틀렸어? ……. 무슨 일이야? 뭐,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테슬라 박사님, 죄송합니다만……. 목록의 12번째는—— ——당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