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다. 그는 분명 너덜너덜해진 프로펠러를 노처럼 써서 육지에 이르도록 노력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만한 힘도, 동기도 없는듯했다. 남자는 한때 파일럿이었다. 에이스 파일럿. 머나먼 과거, 그는 광풍의 독수리, 하얀 구름의 앨버트로스로, 적 기체 80기를 격추했던 푸른 하늘의 총아(寵兒). …… 자유의 느낌이란, 마치 꿈과 같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오늘 어떤 의미로 절대적인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꿈도 없고, 욕망도 없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산송장처럼 걸어 다니는, 「자유」. 이성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계속 경고를 반복한다—— ——이런 이상한 느낌들은, 모두 육체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 체액의 불균형으로 인해 나타나는 환각이다. 구조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텐데. 구조될 수만 있다면, 모든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건데. 그러나—— ——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이질적인 것」은, 계속해서 그를 상기시킨다. 동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조국은 저 환영의 반대편에 있다. 철학자처럼 「희망을 품는 이들, 맹세를 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자랑스레 열반(涅槃)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사처럼 「전장에서 죽어, 위대한 혼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주:

괄호 안의 문장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는,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실패해, 이빨 빠진 늙은 사자처럼, 쇠약해져가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표류의 끝, 「죽음」도 「생존」이란 단어와 별 차이 없이 그저 덧없게만 느껴졌다.
어때? 이번에 표류한 생존자는 뭐하는 녀석이야? 「파일럿」 입니다. 기계를 조종하여 창공을 날 수 있습니다. 우왓! 그럼 우리 저 벽을 날아서 넘을 수 있는 거야? 거기까진……희망을 가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왜? 그가 비행기로 「아스가르드의 벽」을 넘으려 할 때 「신비한 힘」이 작용해서, 큰 각도로 항로를 이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전에 새를 관찰한 것과 종합해볼 때, 「벽」 위쪽에는 공간 왜곡에 의한 단층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뭐라고 말하는지 못 알아듣겠네—— 결론을 얘기하자면, 「비행」은 저 「벽」을 넘는 수단으로는 쓸 수 없다는 거지? 네. 하지만 통상적인 작전에 비행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확실한 이득입니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은 제게 맡기세요. 감사합니다. 만약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물어봐 주세요. 하하하하, 그런 세부적인 문제들은, 나중에 너희들끼리 결정하라고. 당장 급한 건——누가 그 파일럿 씨를, 우리 쪽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겠지? 물론이죠. 근데 그의 상태가……「협력」 운운하기 전에 대화할 「의지」조차 없는 상태여서. ……미리 말해두지만, 전 넋 나간 꼬맹이를 다독이는 취미 따윈 전혀 없습니다. 저, 절 쳐다보지는 말아 주세요……이, 이런 건 어렵다고요…… ——그럼 나한테 맡겨볼래? ……우와. 방금까지만 해도 계속 나를 의심하고, 보검 「듀란달」을 받는 것조차 불편해하던 네가? ……그건 그거고! 다시 말하지만, 난 「네가 옳다」라고 인정한 게 아니야, 알았어? 오? 그건 그거, 이건 이거. 애, 애초에 너희 배에 신세지고 있기도 하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겠어? 게다가, 저 녀석도 군인이지? 아마 제1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에서 온 융통성 없는 귀족 같은 거겠지, 「에이스 파일럿」이라는 걸 보니. 그런 녀석들에겐, 너희 같은 「해적」보단 나 같은 「에이스 발키리」가 더 말이 통하지 않을까? 하하하하하하! 재밌어! 흥미롭네! 아하하하하하! 흥, 날 무시하지는 말라고. 적어도 얼마나 많은 적을 처치해왔냐 같은 얘기라든가——분명 조금이라도 공감할만한 게 있을 거야. 그러니까…… 리타, 먼저 가서 그 사람한테 먹을 걸 챙겨줘! 고칼로리에, 보기만 해도 군침을 흘릴만한 걸로! 알겠습니다, 비앙카 님. 몸을 씻고, 단정하게 잘 차려입은 남성은, 눈앞에 놓인 잘 익은 심홍색의 고기 요리를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고래 스테이크」야. 뜨거울 때 안 먹으면, 맛이 없어진다고. …… 물론 향유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처럼 잘 알려진 종류의 고래는 아니지만. …… 해산물의 비린내도 없고, 부드럽지만 쫄깃한, 기름지지만 느끼하지 않은, 송아지 고기보다 맛있는——「고래 스테이크」! ……아냐. ……뭐? 아직 먹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내 말은!……입맛이 없다는 거다. 뭐? 우리에게 구조 받기 전까지 한참을 조난 상태로 있었으면서——입맛이 없어? ……말도 안 돼, 너 같은 성인 남자가, 아까 꿀물 한 병 마신 걸로 배가 부르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헛소리를, 믿으란 말이야?! ……꼬맹이가 뭘 안다고. …… 아, 이 파일럿 씨는, 자기소개도 없이, 사람을 나이만으로 차별하나 보네? 괜히 구해서 씻겨줬나 봐. …… 표류 중에도 군복을 예쁘게 개어서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 우리 앞에서는 고독한 무명 씨로 남고 싶은가 봐? …… 만프레트·알브레히트·폰·리히트호펜, 파일럿, 독일 제국 제1전투기 전대 대장이다. 비앙카·아타지나, 발키리, 천명의 「LONELY PANTHALASSA」 특별 모험대 대장이야. ……「천명」, 그리고 「발키리」라. ……정말 나하곤 관련이 없는 세계군. 「Wenn schon, denn schon.」(이왕 온 거, 편하게 있으라고.) 나도 원래부터 이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우선 먹기나 해, 안 그럼 진짜 식어버린다고. …… 내 전우들은, 지난 53일간, 물도 없이, 생선과 해초, 새우 등을 잡아 연명했다. 최악의 시간이었지만…… …… 그들은 누구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지, 하지만…… ……오직 나만이, 대장이라는 나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알고는 있다……사고도, 병도, 모든 것은 잔인한 「운명」 탓일 뿐이라는 것은. 하지만 이로 인해…… …… 쳇—— 진짜 귀찮은 남자네. 너. ……? 내 얘기나 들어 봐. 네 앞에 있는 이 요리는 최근에 우리가 상대한 적의 고기로 만들어진 거야. 그렇게나 큰 괴물을 죽였지만 얻은 건 고기나 뼈 같은 평범한 것들. 게다가 양이 너무 많아서 다 먹지도, 오래 보관하기도 어려워. 즉, 네 앞에 있는 건, 겨우 식자재에 불과하다는 거지. 「해초」나 「새우」랑 다를 바 없어. ——이렇게 말해주면, 좀 먹을만할 것 같아? ……너! (꼬르르르르르륵…………) 거 봐, 입은 저항하지만, 몸은 엄청 솔직하네. ……그래서, 다시 표류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불행하게 희생된 동료들이, 네가 자학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 일단 먹어. 나도 조금은…… 누군가를 떠나보낸 경험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먹으면서 들어, 알겠지? 넌 「세계 대전」 한참 진행 중이던 세계에서 왔어. 근데, 또 다른 우주에서는, 그 전쟁으로 일어난 학살보다도 더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어. 붕괴——절대적인 살육만을 가져오는 천재(天災). 이것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아. 논리도 통하지 않아. 아무런 감정이 없는 자연 그 자체와 같아서, 어떠한 만족이나 연민을 가지는 일도 없어. 우리 문명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절대로 멈추는 일이 없을 거야. 들은 이야기론……난 어떤 대붕괴의 생존자 중 하나였대. ——희생된 수억 명의 사람들과는 달리, 살아남은 극소수의 행운아. 하지만, 이 사실이 딱히 실감되는 건 아냐. 결국 내가 그 사건에 대해 기억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장 처음의 기억에서부터, 「비앙카」는 이미 외톨이였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부모님이 누군지도 몰라. 러시아에 있는 보육원에서 프랑스에 있는 고아원에 이르기까지, 나와 비슷비슷한 녀석들을 많이 보아왔어. 일부는 너처럼 비관적이고 매사를 허무하게 여기는 녀석들도 있었고, 일부는 복수귀처럼 증오로 가득한 녀석들도 있었지——물론, 평범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나날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어. 그녀는 고아원에 선생님으로서 온 자원봉사자였는데—— ——그녀의 본업은 천명 본부 직속의 전투훈련 교관. 거기에 발키리 돌격대의 대장이었어. 그 「돌격대」는 발키리 부대들 중에서도 매우 특수한 부대로, 유사시 소집되어, 최악의 조건을 가진 임무들을 맡아왔지.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규율과 훈련만에만 관심있는 끔찍한 군인일 줄 알았는데—— ————웬걸, 그 돌격대 대장이 가르치는 수업이란 게……평화롭고 마음이 편해지는 원예 수업이었어. 백합은 정말 기르기 쉬운 꽃이란다. 구근, 그리고 구근 주위의 뿌리, 잎자루의 주아, 모두 번식에 사용할 수 있으니까……물론 정석대로 씨앗을 써도 괜찮아. 백합의 꽃은 크기도 크고, 향도 아주 좋아——게다가, 키우기도 쉽단다. 아무 들판에 심어도, 크게 관리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잘 자랄 거야.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어. 그 시간을 말로 표현하자면…… 아마 그녀가 가르쳐준 시가 가장 잘 어울릴 거야.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그대를 여름날에 비할 수 있을까?)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그대가 훨씬 사랑스럽고 따스하다네)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거친 바람은 5월의 가련한 꽃봉오리를 흔들고)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우리에게 허락된 여름은 너무나도 짧네) Sometime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때론 태양이 너무나도 뜨겁게 반짝이지만) And often is his gold complexion dimmed;(종종 그 황금빛 안색도 쉬이 구름에 가려지네)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 declines,(어떠한 아름다움도 머지않아 시들어가고)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ed:(우연이나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사라지네)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만은 결코 바래지 않고)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그대의 아름다움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그대 곁에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드리울 일 또한 없을 거라네)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그대는 이 불멸의 시 속에서 영원하기에)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이 시는 오래도록 남아, 그대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니.)

주:

이 시는 셰익스피어 《소네트 18》이다.

이듬해 여름, 우리가 심은 백합이 꽃을 피웠어. 흰 꽃잎, 금색의 꽃술, 그 향기는 여름 내내 이어졌지. 하지만 우리에게 이를 키우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지난 겨울에,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버렸어. 아주 비참한 전투였나 봐……부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 살아서 본부로 돌아올 수 있었어. ……결국 「돌격대」는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지. 사실, 봄에, 그 생존자가 우리 고아원에 찾아왔었어. 이상하게도, 그녀는 「돌격대」에 관한 얘기는 거의 안 하고, 그저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어떤 「학원」의 홍보 밖에 안 했었지. ……그래, 그때 난 그저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학생 모집」이나 하러 온 줄 알았어. 그런 「매정한 사람」을 보고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지. 그런데, 나의 질책과도 같은 질문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착각하지 마. 그 사람의 죽음은……그녀의 전우로서, 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하지만 그 사람과의 추억을 되새기는 걸로, 이렇게 힘들고 슬픈 마음을 너희들에게까지 경험하게 할 필요는 없잖니. 만약 네가 진정 그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고, 그녀의 생각과 가치를 존중한다면…… 그녀가 꿈꿔온 세상을 이뤄주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녀를 존중하는 방법일 거야. 결국, 이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건—— ——공허한 말이 아닌, 진정한 노력뿐이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본부의 발키리 특별 훈련에 지원했지. 나도 고민은 했어, 그 사람이 가르치고 있는 「학원」에 가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하지만 그쪽 커리큘럼은 너무 널널해서, 1인분 하는 발키리가 되기까지, 몇 년을 낭비할 거 같은 거야. ……하여튼 네가 나를 단지 「소년병」이라고 얕잡아 볼 수도 있겠지만, 나 또한 네가 받은 조종사 훈련이 별거 아니라고 치부할 수 있어. 난 현역 A급 발키리, 너랑 다를 바 없이 군인들의 시체와 피로 만들어진 지옥도를 보아 온 사람이야. ——다시 말해, 넌 「동료의 죽음」을 가치 없게 만들고 있어. …… 생각을 「긍정적」으로 사용하자고요, 예의 바른 군인 씨. 잘 생각해 봐, 이 새로운 세계에서, 어떻게 해야 희생된 동료들의 꿈을 대신해서 이뤄줄 수 있을지. 잘 됐어? 모르겠어.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뒀으니……이제 어떻게 될지는, 저 사람에게 달린 거야. 하하하하하하! 이해했어, 이게 바로 「사나이들끼리의 대화」라는 건가? ……사나이? 음, 특정 단어에 너무 신경 쓰진 말고——그냥 「힘이 넘치고 이상한데 고집을 부리는 기사도」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사나이」라고 바꿔버린 건 용서해 줘. 아무튼, 만약 그가 네가 기대하는 수준의 「사나이」라면, 내일부터 지미가 비행기 수리를 시작해도 되겠네. 아. 그러고 보니……네가 본, 내일 우리의 목적지는 어디였었지? ……「알렉산드리아」 말하는 거야?

주:

「알렉산드리아」(Αλεξάνδρεια)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그리스식 도시의 제1호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사후에는 그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될 때까지 발전했다. 지금도 북아프리카에서는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며 약 334만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그래. 아, 그 오래된 성이라면…… 큰 등대? 대도서관? 이젠 더 이상 남아있는 게 없으려나?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알렉산드리아라면 섬에서 데려온 난민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 거라고 네가 말했잖아—— ——그 「알렉산드리아」라는 곳, 그냥 난민 캠프 같은 건 아니겠지? 하하하하하하!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넌 그 편견 좀 버려야 할 거 같은데! ……무슨 의미야? 번영했던 왕조의 수도? 고독한 문명의 잔해? 전부 맞아. 그리고 전부 틀렸어. 알렉산드리아는 살아있는 도시야——온갖 더러움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 방금 단어를 잘 못 쓴 거 아니야? 아냐 아냐. 절대 아냐. 만약 「더러움」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도시」의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밖에. 모든 아름다운 도시는, 그 「아름다움」만큼의 「더러움」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이 말을 기억해둬—— ——그럼, 내일 가슴 깊이 느껴보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