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뭇별이 떠오른다. 경기장은 여전히 열기로 가득하고, 신전도 형형색색의 등불에 둘러싸여 있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여정은 드디어 일단락났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 발키리는, 자신의 몸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아…… 온몸의 피로가 한꺼번에 올라오네. 1박 2일간 제대로 쉬질 못했나? 여기서 그대로 누워, 바로 잠들어버리고 싶네. 좋은 생각이에요. 공기도 상쾌하고, 잔디도 잘 관리된듯하니. 저기…… 정말 그대로 누워버리면, 내일 아침은 돼야 일어날걸? 그럼…… 텐트를 준비할까요? 그럼 괜찮을 거예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안에서 쉴 곳이 있는데, 왜 굳이 밖에서 자냐고! …… ……뭐, 그대로 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이 밤중에 숙소까지 돌아가기도…… 꽤나 머니까. ……별빛이 정말 예쁘네. 그간 별로 가득했던 하늘은 이렇게나 아름다웠는데—— ——왜 항상 좋지 않은 일만 마주하게 된 걸까? 이코르의 일도 그렇고, 대사제의 일까지…… 결과론적으로 보면 다 우리 때문인 것 같은데…… 비앙카 님…… 괜찮아, 리타…… 나도 잘 알아. 우리가 없었다면, 이코르는 전쟁으로 죽었겠지, 대사제는 연방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고 말았을 거고…… 난 그저…… 이런 무력감이 싫을 뿐이야. 그렇게 자책하실 필요는 없어요, 비앙카 님. 뭔가 평소 같지 않으시네요. 물론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강하다고 한들, 결코 신이 될 순 없으니까요. 그 주교님조차도 천명의 모든 부분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신경 쓰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그런 건…… 나도 당연히 알아. 뭔가…… 강박증이라고 생각해.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무지 답답해져서—— ——아, 이런 식으로 내 얘기 하긴 정말 싫은데. 나도 내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이렇게 5년, 혹은 10년쯤 지나면 무지 꽉 막힌 사람이 되어있으려나…… ……그래도, 내가 아는 한, 이것이야말로 유일하게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야. …… 난 더 강해져야 해. 더욱더 강해져야 해. 내 가족, 선생님 그리고 발키리 동료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났어. 각각의 인생은 갑작스러운 끝을 맞이했지, 마치 종잇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듯, 무언가 악랄한, 이 세상 밖의 의지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어. 난 이런 끝이 정말 싫어. 그래서, 그들이 끝마치지 못한 일을——내가 최선을 다해 이뤄주고 싶어. ……이거, 네가 메이드가 되려 한 이유랑 비슷하려나? 네? ……왜, 아니야? 리타·로스바이세, A급 발키리는——왜 메이드가 된 거야? 네 개인 정보에 따르면, 주교 밑에서 했던 수습 과정은 이미 다 끝났잖아? 훗, 비앙카 님은 제 개인 정보를 이렇게나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정말 기뻐요. 야! 이건 상관으로서 자기 부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했을 뿐이야, 알겠어? 뭐 엄청 중요한 프라이버시라도 있는 거야? 하하,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한두 마디로 설명될 게 아니라서…… ……그럼, 한번 제 얘길 들어보실래요? ……? ——어떤 발키리와 소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AD 2007년—— ——영국, 맨체스터. 5년 전, 소녀의 고향에 붕괴 사건이 발생했어요. 딱히 희생자도 없던 작은 사건인지라, 이제 그 일을 기억할 이는 거의 없겠죠.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정원사 집안의 평범한 소녀는 꽃으로 가득한 곳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훈련을 통해 한 명의 발키리가 되었어요. 소녀는 아직도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비명을 질러대고, 거리 곳곳으로 흩어지며 도망쳤죠. 그리고 괴물이 건물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소녀가 그 소란의 원인을 알아차렸을 때, 괴물은 이미 꽃집 가까이에 다가왔어요. 소녀는 그저 중학교 1학년에 불과했죠. 절망에 빠진 채 화분 뒤로 숨어, 괴물이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기도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요. 그렇게, 그녀의 기도가 정말로 통했는지—— 완전히 절망에 빠진 그녀 앞에, 천사와 같은 구원자가…… 나타났어요. 작은 주인님,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레이스로 장식된 옷을 입은 천사는 순간 소녀의 눈앞을 벗어났고, 그녀와 붕괴수간의 전투는 마치 아름다운 공연 같았어요. 중화기가 현장에 도착해 붕괴수가 완전히 소탕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소녀는 이미 스스로 서있을 힘도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소녀가 어쩔 줄 모르고 있었을 때—— ……!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이럴 땐 그냥 언니한테 맡기면 되는 거예요. 현장과 안전 구역 간의 거리는 딱히 멀지 않아, 아마 실제로 안긴 시간은 1분도 안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제 기억에서는, 그 짧은 동행이 영원한 햇살과 황홀한 향기로 가득한듯했죠.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어요. 순수함, 우아함, 따스함, 그리고 굳건함까지, 인류가 추구하는 모든 미덕들이 그녀에게서 한꺼번에 느껴졌어요. ……비록 그때의 저는 조금 내성적이어서, 그 느낌을 바로 그녀에게 말해줄 순 없었지만요. 음, 이쯤이면 괜찮을 거예요. 현장의 건물들은 언제든 더 무너져내릴 수 있으니,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돼요, 알겠죠? 아…… 저기…… 어라? 작은 주인님께선 꽃들이 걱정이신가요? 보험 회사에서 충분히 보상해 줄 수 있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뇨, 그게 아니라…… 네? 저, 저기…… 그, 그게……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 혹시나 작은 주인님께서 제대로 감사를 표하고 싶으시다면, 내일 우리 가게로 와주실래요? 자, 여기 명함. 천사는 길가의 벤치에 소녀를 내려두고, 우아하게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어요. ……소녀는 천사가 준 명함을 천천히 살펴봤죠. 천사가 명함이라고 준 건——실은, 어떤 카페의 광고 카드였어요. 「ABYSS ANGEL, 243 리버풀가」 어…… 아르바이트를 도와달라고 하려나? ——소녀는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죠. 그리고 이튿날, 나름 그 천사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꽃다발을 준비해서, 「ABYSS ANGEL」이 오후에 문을 막 열었을 때쯤 찾아갔어요. 저기…… 혹시…… 입을 연 순간, 소녀는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깨달았어요——꽃다발까지 준비했는데, 정작 그 천사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죠! 하지만 그렇게까지 큰 가게는 아니라서, 소녀가 찾으려 한 그 천사가 곧 그녀를 발견했어요. 좋은 오후에요, 작은 주인님. 우리 가게에 정말로 와주셨네요. 너무 기뻐요! 아슬라우그, 여기 작은 주인님, 아는 사람이야? 네, 어제 처음 만났어요. 저기…… 저기…… 어제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이건 제 작은 성의에요. 해바라기가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요! 어머, 예쁘네요! 정말 고마워요, 작은 주인님. 카푸치노 한 잔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와! 내려주신 커피, 정말 맛있네요! 칭찬해 주시니 정말 기뻐요, 작은 주인님. 저, 저기…… 계속 「작은 주인님」이라 부르시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 서비스의 일환이라는 건 잘 아는데…… 그, 그게…… 너무 부끄러워요. 제 이름은 「리타·로스바이세」예요! 그, 그냥 「리타」라 불러주시면 돼요! 「리타」라——R·I·T·A로 쓰는 그 「리타」인가요? 정말 예쁜 이름이네요. 제 이름은 「라그나」——「라그나·로드브록」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어라, 아깐 「아슬라우그」라 불리지 않았나요? 아, 그건 그냥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에요. 「라그나」라는 이름이 너무 거칠대서, 「아슬라우그」로 바꾼 게 더 귀엽다네요. 「라그나」…… 「아슬라우그」…… 같은 데서 유래했으려나? ……아! 바이킹 영웅! 「아슬라우그」는 그의 아내네요! 하하, 맞아요, 그 「라그나」예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절 전사로서 키우고 싶었던지라——결국 이런 이상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죠. 게다가 가문의 성씨도 왜 하필 「로드브록」인 건지. ……어, 어머니요? 보통 그런 건 아버지 때문 아닌가요—— 하하, 어머니가 발키리였으니까요. 어쩔 수 없죠. 바, 발키리? 그 천명 조직의 아이돌 같은—— 아니에요…… 우린 「아이돌」이 아니라, 진짜 「군인」이에요. 어제와 같은 붕괴로 인한 재난에 맞서 싸우는 게, 우리의 임무죠. 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 괴물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거네요! 음…… 잠깐…… 그러고 보니…… 발키리님께선…… 대체 왜 이런 카페에서 일하고 계신 거예요? 이걸 뭐라 해야 하지…… 하하,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이건 제가 신청한 2주짜리 사회 체험이에요. 실은 내일이면 맨체스터를 떠난답니다. 아…… 그렇군요…… 「사회 체험」이라…… 음, 잘 알겠어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작은 주인님, 사람들과 교류할 때, 서비스업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에겐 어떤 이점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점요? 뭔가 정보를 캐낼 수 있다거나 하는 건가요? 하하, 우리 발키리들은 비밀 요원 같은 게 아니에요. 그런 일을 할 기회도 없고요. 하지만 생각한 방향은 맞았어요——봉사자의 입장이라면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보기가 더 쉬워지니까요. ……손님은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이에겐 진짜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의미인가요? 이해력이 대단하시네요. 세상의 많은 사람은 겹겹이 쌓여있는 가면 아래에 사는 데 익숙하니까요——특히 이런 습한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죠.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마치 고슴도치 같다고 여기죠. 상대의 따스함을 느끼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를 찌르게 되니까요. 하지만, 스스로가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거라는 모습을 「명백히」 보이면—— 사람들의 방어 의식은 자연스레 약해지죠. 그럼 다른 이의 진심을 듣기가 더 쉬워지고, 이 사회가 정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더 알기 쉬워지죠. …… 그, 근데——이런 말은 조금 무례할지도 모르겠는데, 라그나 씨는 이런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 부끄럽다고 느끼시진 않으셨어요? 하하, 그거야 당연하겠죠?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이건 인생에 몇 없을 귀한 경험이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그날, 천사와 소녀는 긴 대화를 나눴어요…… 세상의 온갖 것에 대한 이야기를요. 물론, 그 소녀도 나중에 메이드가 되었다는 건,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만요—— 아. 이미 잠드셨네요…… 비앙카 님. 그럼, 라그나 님의 이름도 못 들으셨을려나요…… 모처럼…… 살짝 결심했는데…… 리타, 마침 잘왔네. 여기 새로운 임무가 있어. 네가 아니면 감당할 이가 없겠더군. 분부만 하시길, 주교님. 리타·로스바이세의 영광입니다. 우선 자료를 확인해라. 너의 임무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이 자의 「성장」을 지켜내는 것이다. 비앙카·아타지나…… A급 발키리…… 12세…… ……12세? 그래, 12세. 역사상 최연소 A급 발키리지. 그러고 보니…… 리타, 너도 라그나의 추천을 통해 13살 때부터 본부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지? 그렇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교님.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다. A급 발키리의 상태는 내가 모두 꿰뚫고 있으니까. 네 추천인, 라그나 양을 예로 들면, 단신으로도 전선 하나를 감당할 수 있는 훌륭한 발키리였지.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그녀의 희생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정말 큰 손실이었다. …… 리타·로스바이세——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라그나·로드브록의 추천을 받은 이 중 가장 우수한 자—— 그 라그나의 희생으로 발키리가 되기로 결심한 이 아이를 잘 돌봐주시게.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주교님. 근데, 주제를 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교님에게 있어, 비앙카 양은…… 「표본」입니까, 아니면 「인간」입니까? 하하하, 역시 특별훈련을 받은 암살자답군. 이렇게 해두지, 리타. 나는 이 아이에게 특별한 기대를 품고 있긴 해. 딱히 숨길 게 있는 것도 아니지만——아직 이에 대해 서로 논하기엔 전제조건이 부족한듯하군. 하하, 지금 상황은 어느 유명한 소설의 글귀로 표현하는 게 알맞을지도?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