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발키리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분노와 충격 같은 감정에 지배되어서가 아닌—— 과거의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무의식이, 그녀의 손을 이끌며, 눈앞에 있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려 했기 때문이다. 약하지만 맥박이 있다.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술용 산소통과 마취제는 제 역할을 해주었다. 다음은 수혈을 할 차례, 수술을 위해 상처를 개방하기 전에, 혈액형을 확인해야 한다. ——주변의 어느 것도 신경 쓸 여유 없이, 발키리는 미친 듯이 밤하늘 아래로 달려갔다. (빨리 결과를 보여줘, 혈액형 시험지!) (빨리 나나 리타가 수혈을 할 수 있다고 알려줘!) (우리 말고는, 심장수술의 수혈량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단 말이야——) (부탁해, 시험지! 아직 구할 방법이 있다고 말해줘! 0.01%의 확률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최소한 파란색이라도 보여줘!) …… 발키리는 거친 숨을 쉬며, 잠수함의 안쪽 갑판에 주저앉고 말았다. 두 개의 시험지 모두, 예외 없이 적갈색을 보였다. 그땐, 이미 샘플링 후 3분, 시험지의 반응 시간의 6배이 넘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결과는 의심할 바 없이—— ——O형. 이 혈액의 혈청은 A형과 B형의 적혈구를 모두 응집시킨다. 즉, O형인 사람은 오직 다른 O형의 피만 수혈받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녀나 리타 모두, 열 명중 세, 네 명이나 있는 O형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 작은 시험지는, 모든 외과 수술에 대한 가능성에 빨간불을 보이고 있었다. 저 멀리 잠들어있는 천명 본부의 신의 열쇠, 백화흑연이 아니고서는—— ——그녀나 다른 선원들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소녀의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발키리는 깨달았다. 그 발키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그 소녀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뿐. ……다음으로, 타수마 님의 부탁에 따라, 이코넬 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신탁」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3번째 박툰은 새 시대의 시작이라고.」 「12번째 박툰의 마지막 날,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될 것입니다.」 「신은 더 이상 우리들을 축복하지도, 저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미래의 모든 것은, 진실되며, 자연스러운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 「그리고 떠나시기 전에, 신께서는 진실되고, 순수하며,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신의 세계에 함께할 수 있는, 화신을 함께 데려가길 바라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모두의 사랑에서 왔으니, 분노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질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익스·타브님께서 제게 천계와 인계가 분리되면, 우리 인간세계도, 신들의 세계처럼 빛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그렇게 새 시대가 오면, 범인들도 자신의 두 손으로 노력해, 신께서 내리시는 것과 비견될만한 기적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 신의 가장 순수한 화신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군. 모두들, 이만 떠나도록 하자. 조금…… 당황스럽군요. ……우리가 당황하고 말고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네. ……어찌 되었든, 적어도 그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남긴 「신탁」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될 거라는 것이에요.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을 되돌릴 순 없으니. …… 네, 이만 떠나도록 하죠. 남쪽으로, 그 「연방」의 영토로. ……그녀를 위해서, 그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뭐라든 해야겠어요. ……나, 「나콤」님께서 오십니다!! 어, 얼른 가서 촉(Chʼok)님께 보고하라, 「나콤」님이 오셨다고!

역주:

촉(Chʼok): 마야 문명의 귀족, 원래는 왕세자를 제외한 왕자를 의미했지만, 후에 귀족 전부로 그 의미가 넓어졌다.

나콤(Nacom): 마야 문명의 사제 중 하나로, 직접 인신공양을 하곤 하였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얘네들 주둔지 아냐? 왜 다들 도망가 버린 거지? ……아마 어제의 일로 두려워 달아났을지도. 어쨌든, 좋은 기회이긴 하네. 저 병사들의 행동거지를 보니,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아예 싸울 의지조차 없는 것 같아.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진짜 해적을 연기해야 할 것 같은데, 발키리 아가씨. ……? 걱정 마, 그냥 저들의 태도를 이용하는 게 다니까, 무지 쉬울 거야. 게다가, 지금 저렇게나 널 두려워하니, 어쩌면 그냥 「몇 마디 말」만 하는 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지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나콤」님. 이곳은 툴룸 요새로, 소인은 이곳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카오악이라 합니다. 어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저지른 「연방」의 군인들을 대기시켰습니다, 부디 용서를. 자, 잠깐만. 네가 한 말…… 다시 한번 말해줘,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어. 어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저지른 「연방」의 군인들을 대기시켰습니다, 부디 용서를. …… 너희들, 태도가 너무 빨리 바뀌는 거 아냐? 전에 「엘·레이」에서 보였던 오만한 태도는 어디로 간 거야? 부디 용서해 주시길. 당신은 「나콤」이기에, 연방의 모든 군인들은 「나콤」님에게 무례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나콤」이 뭔데? 왜 나를 갑자기 「나콤」으로 여기는 거야? 「나콤」은 「초월자」입니다. 모든 사람을 초월하여, 신이 아닌 대지에 충성하는 영웅입니다. 대사제께서 가르쳐 주시길, 「나는 너희 모두가 초월자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럼에도 너희 스스로가 초월자가 되지 못한다면, 진정한 초월자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거라.」 「그들이 커다란 바다라면, 너희는 바다 사장의 모래알에 불과하다. 너희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저 그들의 발밑에 가라앉을 뿐이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저희와 같은 소인들은 그저 대사제의 가르침을 따를 뿐, 갑자기 당신에게 잘 보이려 그러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런 행동이 당신을 난처하게 했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 그럼 내가 「엘·레이」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걸 금지시킨다면, 너희들은 그 마을을 내버려 둘 수 있어? 그렇습니다. 대사제님께서 당신의 주장을 뒤집지 않는 한, 소인과 다른 이들은 이를 법률처럼 따를 것입니다. 당신이 바라신다면——「엘·레이」를 독립되고 간섭할 필요가 없는 국가로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 좋아, 그럼 내가 「나콤」이라 하자. 그리고, 내 동료랑 선장, 그들을 「나콤」이라 여기는 것도 별문제없겠지? 그렇습니다. 소인이 보기에도 그들 모두 강한 전투력과 정신력을 지닌 것 같습니다. 그럼 됐어. 나, 「나콤」은 너희가 만남을 주선해 줄 수 있길 바라——나와 내 동료가 너희의 「대사제」와 만날 수 있도록. 가능해? 알겠습니다. 소인이 즉시 치첸이트사 시에 사람을 보내, 대사제님을 뵐 수 있도록 부탁하겠습니다. 그 사신이 다녀오려면 시간은 얼마나 걸려? 역들을 따라 달리면, 대략 하루하고 반나절의 시간이 걸립니다. 달려서 간다고? 진짜 원시적이네. 그래도 역이 있으니…… 도로 상태는 괜찮겠지? 연방의 군인들이 매년 따로 시간을 내어 길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넌 똑똑한 안내자나 하나 골라줘. 우리가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르고 편한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 와! 신난다! 정말 빨라요! 나콤님 만세! ……저기, 리타. 자전거 타는 게 저렇게 재밌어할 일인가? 그럼요, 비앙카 님. 이 가이드씨는, 생애 처음으로, 달리는 것보다 빠른 속도를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아, 그러게, 여긴 말이 없지. 그러니 저분에게 지금 이 순간은 마치 한밤중에 엔진 소리를 크게 내며 달리는 폭주족처럼 들떠있을 거예요. ……폭주족? 그게 뭐야? 속도를 내며 오토바이 타는 걸 즐기는 사람들을 말해요. 주로 남자들이 많지만, 가끔 여자들도 있죠. ……아, 그 양아치 같은 녀석들? 훗, 비앙카님, 물론 그런 불량한 사람들도 있지만,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모두가 그런 건 아니랍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함께 늦은 밤 나폴리에서의 드라이브는 어떠신가요? 음…… 기회가 된다면야…… 미안, 내가 오늘은 좀 기운이 없네. …… 우린…… 정말 아무런 도움도 안 됐어.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던 건, 그녀가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걸 지켜보는 게 다였어. 이번 일…… 분명 있었을 거야…… 더 나은 방법이…… …… 어쩌면…… 이런 게 인생이지 않을까요, 비앙카님? 아마 들어보셨겠지만, 나폴리 교외에는 화산재에 묻혀 영원히 「서기 79년」에 멈춰있는 유적——폼페이라는 곳이 있어요. 실은 폼페이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화산이 분출을 시작한 당시, 충분히 탈출할 기회가 있었어요. 하지만 최초의 지진이 멈춘 후, 화산재가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자신의 살림을 지키기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갔죠. ——네, 이 혼란을 틈타 남의 금은보화를 훔치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다들 그저 빨리 집을 고치고, 아직 망가지지 않은 물건을 다른 데로 옮길 생각뿐이었죠. 하지만, 무정한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어요. 불행하게도 이들은 수백 도의 밀려오는 화산재에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죠…… 결국에 그들이 지키려 한 살림들은 죽어버린 그들에게 있어 영원히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나요? 그 시절, 그들에게, 화산 활동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탈출 계획을 세울 기회가 과연 있긴 했을까요? ……당연히, 있을 리가 없겠죠. 사람은 전지전능하지 않으니까요. 과거를 비판하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현재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난…… 정말…… 더 이상 얘기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비앙카님의 마음, 저도 잘 이해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 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흘러내리는 눈물부터 닦아, 이 바보야!! 후훗. 역시 비앙카님은, 정말 귀엽다니까요. 야!!! 너 자꾸 징그럽게 굴래!? 여러분들 우리는 방금 스칼라쿠푸 역을 지났어요, 이 정글만 지나면 이제 치첸이트사 시가 나올 거예요. 거기는 대도시야? 앞서 여러분들이 말씀하신 「대도시」에 비하면 치첸이트사는 「작은 편」이에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3천보 정도 되니까요. 음, 그 정도면 아마 아작시오(Ajaccio)랑 비슷한 크기겠네요. 하하, 고고학 박사, 혼자만 아는 말을 하면 어떡해? Ajaccio? 어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이름인가? 아뇨, 코르시카의 수도입니다. 프랑스령이죠. 아, 그렇구나. 코르시카가 프랑스령? 역사는 참 신기해. 그거, 선장한테는, 진짜 「미래」 아냐? 하하, 만약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안다면, 그걸 뛰어넘을 방법을 찾아야겠지! ……「숙명론」을 싫어해서 그래? 음, 그런 면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바뀌었다는 거니까! 예를 들어 수세식 화장실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푸세식 똥통에 쪼그려앉아 일을 보게 하는 건 무지 곤란할 테니까——대충 이런 이유랄까? 저기, 예시를 좀 바꿨으면 하는데…… 너무 지저분하니까. 하하, 네가 방금 한 말에도, 「발전된 세계」의 상징이 있지, 그렇지 않아? 「발전이 덜 된 세계」의 시점에선, 모두가 「결벽증」 환자처럼 보일 테니까. 상상이 돼? 13, 14세기 유럽에선 심지어 귀족들도 목욕을 거의 하지 않았어. 내가 살던 시대도, 의사들조차 수술 전에 손을 소독할 필요가 있다는 걸 몰랐었지. 누구는 그 시대를 인문학의 시대라 부르더라? 정말 어이없어. 그 시절 존재하는 책을 전부 모은다 한들 지금있는 대도서관의 한구석도 못 채울 거야. 게다가, 내가 이런 미래와 「조우」하지 않았다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아름다운 선율을 즐길 기회도 없었겠지? 인류의 본질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동물이야. 솔직하게 욕망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가는 거지. ——안 그래요, 거기 가이드 씨? 자전거를 베껴 「자체 생산」하는 데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노력해 보고 싶을 거예요, 그렇죠? ……어르신, 뭔가 분부가 있으신가요? 아. 통역이 있어야 우리 말을 이해한다는 걸 깜빡했네. 우와! 정말 큰 신전이네! 엄청난 역사를 가졌나 봐요, 가이드 씨. 네, 여긴 대략 천년쯤 전에 지어졌다고 하니까요. 처, 천년이나요? 네, 나콤 님. 대사제님께서는 저희에게 최선을 다해 역사의 흔적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고대 신전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건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대사제님께서는 수많은 개보수 계획을 준비해두고 계시죠. 그분을 뵈고 나면, 아마 금방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치첸이트사에서 무엇보다도 장관인 건축물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바로 이 쿠쿨칸 신전이 되겠습니다! 쿠쿨칸은 고대신의 이름으로, 「날개달린 뱀」을 의미하며—— 좋아, 좋아, 이 신전이 대단하단 건 알겠어. 근데 저기…… 신전 뒤에 있는 건 뭐야? 쇠로 된 바윗덩이? ……「쇠로 된 바윗덩이」? 아! 어르신, 「쿠쿨칸의 심장」을 가리키시는군요! 저기 멀리 보이는 운석을 말씀하시는 거죠? 뭐? 저게 정말 운석이라고? 언뜻 봐서는 호주의 울루루 바위랑 비슷해 보이는데…… 하하, 멀리서 온 방문자여, 저건 칙술루브에서 발견한 별의 핵입니다. 틀림없이 하늘로부터 떨어졌죠.

주:

칙술루브(Chicxulub, 마야어로 「악마의 꼬리」를 의미한다) 크레이터는 유카탄반도 북서쪽에 위치하며, 직경 150km~180km의 운석이 충돌하여 생긴 크레이터이다. 또한 운석 충돌로 인해 생긴 지형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크다.

2010년 3월 5일, 사이언스지에서 발표된 한 연구보고서에서는 6500만 년 전 이 분화구를 만들어낸 소행성 충돌이 공룡 대멸종을 일으킨 주원인으로 여기고 있다.

p.s. 이 운석 충돌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탄——「차르 봄바」의 수백만 배에 달하는 폭발을 일으켰다. 이에 충돌 반경 10km 이내의 모든 것은 순식간에 기화되어버렸을 것이다.

앗! 대사제 폐하! 소인을 용서하소서!
괜찮습니다, 이만 몸을 일으키세요. 먼 곳에서 오신 손님——하늘의 별과 새들이 여러분의 방문을 예고해 주었습니다. 저는 「반도 연방」의 대사제, 에스텔·차라투스트라입니다. 여러분이 절 부를 땐 「에스텔」이라 불러주시길. 손님 여러분, 아마 여러분들께선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우리 연방에 대한 정보를 습득해오셨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정식으로, 제가 세운 이 나라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해드리고 싶군요. 여러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유카탄 반도의 장기력이 이제 곧 13번째 「박툰」을 맞이한다는 것을. 이러한 「장기력」이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야의 문명사회는 적어도 거의 5천 년간이나 존재해왔었겠죠. 하지만, 여러분도 보다시피, 이곳의 도구들은 너무나도 원시적입니다. 밭을 갈 가축도 없죠. 다른 「표류자」처럼 제가 여기에 처음 이르렀을 땐, 어떻게 이렇게 도태된 문명이 존재할 수 있는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이건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리학적으로 보면, 여기 유카탄 반도는 애초부터 매우 「척박한 땅」이니까요. 밭을 갈 가축이 없다? 그건 가축화가 가능한 동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없다? 그건 바로 이 반도에 쓸만한 광산이 전혀 없고, 가장 가까운 광맥은 멀리 떨어진 멕시코 고원 깊숙한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세대를 거치며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곳의 역사가 이렇게 긴지 몰랐다면, 저는 분명 고대 「이전」으로 떠내려왔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손님 여러분, 저는 원래 「만왕의 왕」 키루스 대제의 시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다른 표류자들은 이를 2500년이나 지난 「고대 시기」라 하더군요. ……네? 왜 그리 놀라시나요, 아가씨. 당연하죠! 대체 어, 어떻게 스페인어를 그렇게 유창하게 하는 거예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언어는 당연히 그 시대와 장소에 맞는 걸 써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곳 대부분의 표류자들이 같은 언어를 구사할 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제 언어를 고집할 필요는 없겠죠. 하, 하지만 여기 현지인들은 상형문자 같은 걸 쓰지 않았나요? 얘기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그건 선진 기술을 묘사하기에 어휘가 너무나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매번 억지로 통역하는 것보다는,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게 더 나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죠. ……저, 정말 그게 이유에요?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가치가 낮은 건 마땅히 도태되어야 한다, 이건 제가 10살 때 제 아버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 네, 그게 제 아버님의 성함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상에 따라 지금의 「연방」을 세워 다스려 오고 있습니다. ……이럼 어떨까요, 여러분들의 의구심을 해소시켜드리기 위해, 「쿠쿨칸의 심장」으로 자리를 옮겨 천천히 얘기하는 건? ……네? 그 운석이 있는 곳에서요? 이거…… 왜 운석 안이 이렇게나 호화로운 거예요? 하하, 이건 그저 버려진 탄광 통로를 재활용 한 것이랍니다. 정말 신비롭네요, 에스텔 님의 관저에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긴 「대사제의 관저」라기보다는 「대사제의 연구실」이라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겁니다. 그래요? 대사제 폐하께선 어떤 종류의 실험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그걸 설명하기 전에…… 먼저 손님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도록 하죠. 제 아버님에 대해 얼마나 들어보셨습니까? 「차라투스트라」요? 그리스어로 「조로아스터」라 불리는 페르시아인 예언자 아닌가요? 네, 그분 또한 대사제셨죠. 그리고, 정정하자면——「페르시아」는 그리스인들이 저흴 부를 때 쓰는 이름으로, 정확한 이름은 「이란」입니다. 음, 하여튼 당신의 아버님께선 조로아스터교를 세워, 이란의 다양한 민족들이 통일된 가치관을 가지도록 도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훗날 역사 속의 많은 이들이 그를 숭배하게 되었죠. ……그것이 그에 대한 표류자의 평가군요. 여러 오해가 담기긴 했지만. ——이외에 더 아는 게 있으십니까? 내가 아는 건, 그가 남긴 「아베스타」가 신비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던데…… 안타깝게도 그 3분의 2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불타버렸지만. 하하,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딱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겁니다. ……뭐? 간단합니다. 아버님께선 살아생전 결코 그러한 경전을 집필한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죠. 게다가, 제가 들은 것에 따르면——「조로아스터교」는 이미 후대에 의해 원래의 의미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질된 상태였습니다. ……그럼, 당신이 방금 설명을 피한 그 「실험」이라는 것은, 이런 역사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인가요? 물론입니다, 선장 아가씨. 모든 것은…… 전설 속의 「뱀의 왕」과 매우 밀접하게 얽혀있으니까요. 이리 와서 앉으시죠. 제가 천천히 얘기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