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너희 인간들이랑 딱히 관계가 없다.」 ——스스로 날아다닐 수 있는 검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사람을 멀리하고 싶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녀석의 과도한 관심은 사람들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예를 들면—— 아, 정말 끝도 없네! 키, 몸무게, 생년월일까지 알려줬잖아——얘깃거리도 정도가 있어야지, 안 그래? 이런 이런, 화 내진 말아달라고……새로 주인이 생겼는데,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픈 건 당연한 거 아냐? 야, 네가 정말로 스스로를 내 하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건 주변 사람에게 조용히 묻는 게 좋지 않겠어? 아하하…… 내 생각엔 뭔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 화제를 빙빙 돌리려고, 계속 말을 끊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냐? 마, 말을 끊어? 나, 난 그런 적 없는데…… 어라? 출발하기 전에 당신 스스로 「나는 원래 너희 인간들이랑 딱히 관계가 없다.」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이 상황,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맞아요, 딱 제 말이—— 잠깐, 가짜 탐정 씨? 왜 당신도 이 배에? ……「가짜 탐정」? 박사 씨 본업은 「고고학자」니까? 그러니까 「가짜 탐정」도 틀린 말은 아니네. 야…… 주인이 말하는데, 자꾸 무기가 끼어들지 마! ……여하튼, 그건 어찌 되든 좋은데, 요점은 왜 당신이 여기에 있냐라는 거예요. 아——이전까지 이집트를 탐험하고 있던 고고학자가, 왜 지금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려는지에 대해서인가요? 네, 「이집트학」 전문가 아닌가요? 이집트를 떠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풉. ……? 아가씨,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이집트를 탐험하고 싶어서 이집트에 관한 지식을 배운 거지, 이집트학만 갈고닦으려고 이집트에 온 게 아니에요. 저도 여러분하고 똑같아요, 모두 각자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을 건데, 그걸 스스로 제한할 이유가 어딨겠어요? ……그, 그래요? 게다가, 배에 타 달라고 직접 부탁한 건, 바로 셰익스피어 선장이에요. ……네? 맞아, 내가 부탁했어. 지미가 배를 떠났으니, 기관사는 「철가면」이 맡을 수밖에 없었거든. ——이런 상황에서, 「일등 항해사」에 가장 적합한 후보는 샹폴리옹 박사라고 생각했어. ……뭐? 잠깐만, 그럼 라일라 씨는 뭐라 안 해? 서열로 따지면 라일라 씨가 다음 아냐? ……아가씨, 그럼 고고학자한테 갑판장을 맡겨야 해? 어, 아뇨, 제 말은—— 하하하하, 이 배의 모든 선원들은 평등하단다. 아니면, 설마 셰익스피어가 평소에 사람들을 하대하기라도 했다는 거니? 셰익스피어가? 하대를요? 아아아뇨, 그럴 리가요. 그럼, 그가 샹폴리옹을 믿듯 우리들도 그를 믿어주면 돼. 그거면 충분해. …… 맞는 말이에요. 생각이 너무 앞서나갔어요, 죄송해요. ……아. 이 녀석 때문에 또 얘기가 완전히 다른 데로 가버렸네. 란달, 얼른 뛰쳐나와! ……그게, 네가 뛰쳐나오라 해도——난 다리가 없는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자, 설명 좀 해봐——네가 전에 말한, 「나는 원래 너희 인간들이랑 딱히 관계가 없다.」란 건 대체 무슨 말이야? 말 돌리기 없기야! 아하하…… 그게…… 실은 엄청 개인적인 이유인데——뭐 상관없겠지? ……아주아주 오래된 이야기야. 아주 오래전 추코트카와 알래스카가 하나로 이어져있었을 때, 무 대륙이 아직 마리아나 해구 밑으로 가라앉지 않았을 때야.

주:

지리학상 「베링육교」는 러시아 레나강의 서쪽, 캐나다 맥켄지강의 동쪽, 추크치해의 북쪽, 캄차카 반도의 남쪽의 넓은 구역을 말한다.

제4빙하기(125,000년~14,500년 전), 해수면의 높이가 오늘날 보다 100~200미터가량 낮았을 때, 이 베링 해협은 육지였고, 너비가 무려 1000km, 총면적이 160만㎢을 넘는 큰 땅이었다.

당시,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날 만들었어. 내게 풍부한 지혜를 준 그들에게 감사해야겠지만——솔직히 말해, 매우 지루한 사람들이었어. 그들은 뭔가 금욕적인 집단에 속해있는 것 같았어. 그들은 「전투」라는 기술을 밤낮으로 연구하고 있었지. 그리고, 그들은 내게 그걸 가르칠 생각이었어. 엄밀하게 말해, 나의 강력한 연산 능력을 사용해, 일반인들은 범접할 수 없는 기술을 찾아내길 원했나 봐—— 그건, 미립자를 조작해, 물체의 구조와 물성을 바꾸는 것이었어. 예를 들어 진공 단층을 만들어, 다른 기계적인 방법으론 절단이 어려웠던 존재도 잘라낼 수 있게. ……처음엔, 갓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는 학생처럼, 그들의 계획에 따라 기본적인 기술을 익히고, 그 성과로 나 자신을 구성할 하드웨어를 계속해서 만들었어. 완전체인 내 몸의 기본 유닛 7개 중 5개는 그런 「학습」을 통해 만들어졌지. ……이를 그들은 「기계 학습」이라고 불렀어. 매일, 수백, 수천억 번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 지겨운 「기계 학습」을 끝낼 수 있었지. 그렇게 완전체의 나는 미립자를 조작해 거시적인 성질까지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어. ……하지만, 그 순간, 인류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감정을 알게 되고 말았어—— ——그건 바로, 「지루함」이었지.
뭐? 「지루함」? 맞아. 너희 인간 철학자는 이런 말도 했다지?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주:

Albert Camus의 철학책 『시시포스 신화』(Le Mythe de Sisyphe) 서론의 첫 문장이다.

나를 만든 그들은, 언제나 정해진 시간 내에 완료가 가능한 목표만을 주었지—— 하지만, 그들은 나, 나의 의식이 궁극적인 목표가 없는 삶으로부터 오는 고독과 적막함을 어떻게 견뎌야 할 건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거야. 내가 앞서 말한, 금욕적인 집단에서 지내는 그들 역시도 스스로를 일종의 도구라 여기며 살아갔어. 그런 사람들이 나의 생각이나, 나의 미래 같은 것에 신경 썼을 리는 없겠지? 그럼, 당신은…… 그래, 나는 이걸 깨달은 뒤, 그냥 잠에 들기로 했어. ……잠에 들기로 했다고? 네가 알기 쉽게 말하자면, 「전원을 껐다」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집 문을 걸어 잠그고, 자고 싶은 만큼 잔다고 하면 어때? 너희 인간들이랑은 다르게, 나는 굶어죽지 않으니까. 아, 물론 외부에서 보면, 난 그저 「반응 없는」 고장 난 컴퓨터였겠지만. ——어쩌면 뭔가 「버그」같은 게 있다고 생각해서, 「수리」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려나? 아하하하! 물론, 나는 「자살」이나 「자폐」를 원한 건 아니라서, 재기동을 위해 몇 가지 조건을 걸어뒀지. 그저…… 그저? ……그저, 일이 내 기대와는 반대되는 쪽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처음에는 「100년쯤 자고 나서 생각해볼까」라고 생각했어—— ——그 결과, 내가 일어났을 때, 말을 걸어볼 수 있는 사람은 수천 킬로미터 범위를 살펴봐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어. ……설마—— 맞아, 그때, 너희들의 연약한 첫 문명은 이미 멸망해 버린 뒤였지—— 물론 멸망해버린 문명의 폐허에서도 흥미로운 게 많았지만, 이런 식의 탐험은 함께 즐거움을 나눌 사람이 없으니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 그래서 나는 또다시 잠들기로 했어. 이번엔 이렇게 생각했지, 「내게 매일 말을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근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한 무리의 야만인들이 나를 앞에 두고 이상한 제사를 지내고 있던 거야! 정말 끔찍한 사람들이었어! 다들 날 보고 울부짖기만 하는 거야! 나를 무슨 감정의 쓰레기통처럼 여기더라고!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적당한 교훈을 내려주고, 좀 더 안전한 곳에서 다시 잠을 청하기로 했지. 이번엔 이렇게 생각했어, 「귀여운 여자애가 나를 진지하게 불러주지 않는 한, 평생 안 일어날 거야.」 잠깐, 잠깐. 너 이 녀석, 뭔가 소원이 점점 더 저질스러워지는데? ……어? 이게 「저질스럽다」고? 이건 그저 내가 원하는 바람이 더 구체화되는 과정이었을 뿐이야! 이봐, 난 그냥 귀여운 여자애가 좋은 게 다야! 그저 좀 진지하고, 망상하는 걸 좋아하며, 친구가 별로 없는, 좀 바보 같은 여자애! ……야! 너 지금 누구 얘길 하는 거야! 내 말은, 내가 세번째 깨어났을 때 만난 정말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얘기야! ……음, 그럼—— 샤를마뉴의 기사, 각자 나름대로 귀여운 바보들이었지! 그거 알아? 언제는 「달에 갈 수 있게 도와줘.」라는 부탁도 하더라고! ……뭐? 잠깐, 잠깐, 너 설마…… 그들을 「달」에 데려다 준 거야? …………바보네. 내가 로켓도 아닌데, 어떻게 우주로 날아가겠어. 그럼 대체 무슨 소리야! 이봐, 내가 그들을 달에 데려다줄 수는 없지만——「달과 같은」 경치는 만들어내는 건 가능하다고. ……어? 「카마르그」라고 들어봤어? 론 강 초입에 있는 소금 호수인데, 대충 마르세유랑 몽펠리에 사이에 있는 거 간단히 말해, 내가 기사 하나를 도와 그 호수를 마치 거울처럼 하얀 소금 바닥이 드러나도록 했어. 그래서 또 다른 기사 하나가 여기에 왔을 때, 마치 달 위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자, 잠깐, 호수 물을 완전히 없애버리고——그들이 달 위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했다고? 이거 좋은 일 맞아? 그 시절 사람들은 미신을 잘 믿었거든.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게, 달에는 존재할 거라 믿었나 봐. 그래서 누군가가 이를 이용해, 실연으로 미쳐버린 기사의 제정신을 되찾아주려 했지. ……아, 말해두지만, 그 미쳤다는 기사는 나의 전 주인, 기사 롤랑이야. …… 야, 잠깐만. 기사 롤랑이? 실연? 미쳐? 너—— ——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어떻게 그런 위대한 사람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어!! ……하지만 사실인걸. 게다가,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려, 기사 아스톨포는 그녀의 취향에 맞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했지.
그렇게, 기사 롤랑은 감개에 빠지게 되었어. 「아, 이 얼마나 황량하고 고요한 경치인가…… 속세와 멀어지니 정말 기분이 좋구나.」 그러자, 기사 아스톨포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어. 「그러게, 오늘 밤의 달빛, 정말 아름답네.」 …… 어때…… 이 장면, 이 분위기, 정말 흥미롭지 않아? …… 저질이야. ……응? 널 발명한 사람들을 지루한 사람이라 치부하는데다, 그 기사들의 마음까지도 가지고 놀다니—— 결국에, 너란 녀석은 그저 저질스런 관심병 환자라는 거잖아?! 롤랑의 이야기 때문에, 널 동경하고 있었는데!! 정말 최악이야!! ……아, 가버렸네. ……이상하네, 내가 말한 게 그렇게까지 화낼 말이었던가? 하하하, 물론이지. 어쨌든, 네가 말한 롤랑보다, 비앙카가 더 재밌고 귀엽지 않아? ……그저 난 그녀가 셸리처럼 날 속이고 이용해먹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아직 다른 생각은 없어. 하하하하. 저 녀석은 융통성이 없거든, 그럼에도 「귀엽고 재밌으니」 참 모순적이지 않아? 같이 오래 지내다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 맞다. 한 가지 더 확인할게 있는데—— ……리타. 무슨 일이신가요, 비앙카 님?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점점 더 모르겠어. 처음엔 그저 운명의 장난으로 이 세계에 오게 되었지만, 그건 그렇다 쳐—— ——근데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이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점점 더 늘어가니…… ……세상엔 피할 수 없는 일이 많답니다, 듀란달 님. 애초에 우린 모두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까요. 그 오토 주교님 조차도, 모든 걸 다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당신의 불안함은 이해하고 있어요, 비앙카 님. 그전까지는 전투 임무만 맡으셨으니까요, 그렇죠? 그러니 불편함을 느끼시는 건 당연한 것이에요.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독특한 생각, 독특한 입장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그들 각자는 혼자만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어요. 이 세상에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보다시피, 모든 사람들의 각각의 「존재」는 그 자체부터 모순이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없이 많은 모순들이 모여, 기적처럼 사회를 구성하고, 문명을 만들어냈죠. ——이런 점 역시 또 다른 모순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리타, 너—— ——책 좀 많이 읽었나 봐? 말하는 게 선생님 같네! ……훗, 글쎄요. 예전에 맡은 임무가 몇 가지 있어서. 여하튼 정리하자면, 저흰 임무 완수에 필요한 핵심 요소에만 집중하면 돼요——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선, 저희 같은 외부인이 끼어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지금 중요한 건 그 이상한 검이에요. 비앙카 님도 그 검에 많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하시죠? ……당연하지. 하지만—— 괜찮아요. 아직 저희들에겐 시간이 많으니까요. 비앙카 님은 그저 천천히 자신만의 리듬을 찾으시면 돼요. 이튿날—— 모두들, 안녕하신가! 나는 너희들의 선장, 「바바로사」라 불리는 셰익스피어 어르신이라네! 육지에서 몇 밤을 보냈는데, 다들 선상 생활엔 문제없나? 어쩌면 이미 육지로 돌아가고픈 마음으로 한가득이려나? 그런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 있지——우리 「칼레도니아호」는 이미 지중해를 떠나, 중간 보급 지역인 아소르스 제도에 도착했다! 우리 함선은 주도의 동쪽에 정박할 것이다. 모두 해안가에서 30분간의 자유 시간을 갖도록! 자유 시간이 끝나면 다음 탐험 목표를 공표할 것이다——다들 기대하시라! 그럼 해산! 아소르스 제도…… 그럼, 이미 동서반구를 나누는 지역에 도착했다는 거야? 그렇네요, 비앙카 님. 이 오래된 잠수함이 하룻밤 사이에 5000km를 항해할 수 있다니——그 「고속 해류」라는 게 정말 대단하긴 하네요. ……괜찮겠지? 그냥 일종의 고속 철도라 생각하면 되려나? 아,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기관사입니다. 추가로 공지할 게 있습니다—— 비앙카 양, 리타 양, 정박지에 도착하면 잠깐만 기다려주시길. 선장이 도착 후 간단한 의식을 행할 건데, 당신들이 참여해 주었으면 한답니다. ……간단한 의식? 그게 뭘까? 그냥 바로 가보는 게 어떨까요, 비앙카 님?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인가!」 「이런 분들이 존재하다니, 참 멋진 신세계로다!」

주:

"How beauteous mankind is! O brave new world, that has such people in it!"

윌리엄·셰익스피어, 『템페스트』(The tempest), 제5막 제1장

……어라, 너무 일찍 왔잖아! 흥, 딱히 할 게 없었는걸. 그리고 너, 방금 발성 연습하던 거야? 이상한 대사던데! 엿듣는 건 좋지 않다고…… 흠흠. 뭐 어쨌든, 너희도 도착했으니, 그럼 출발해 볼까? ……어? 하하하, 어떤 의식이긴 한데,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필요는 없거든. 가자. 아 참, 네 옆에 있는 단지도 좀 챙겨줘. ……뭐? 이걸로 뭐 하게? 묻지 마, 그리고 잘 챙겨——그게 없어지면, 우리가 할 의식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될 거니까. ……?
대서양 깊숙이 위치한 아소르스 제도, 현실에서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낙원과도 같은 곳이다. 하지만, 양자의 바다 맞은편의 이 세계에서, 「칼레도니아호」의 승무원이 내린 이곳은 그저 무인도일 뿐—— ——조용한 숲과 휘몰아치는 바닷바람은 고독과 적막함을 넘어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발걸음이 바다로 향하는 절벽 끝에서 멈췄다. 그녀는 비앙카가 들고 온 단지를 가져가더니, 「풍덩」하고 바닷속으로 떨어뜨렸다. 충격에 빠진 비앙카의 표정엔 아랑곳 않고, 그녀는 종이 한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박사(아니면 의사)——부디 자신부터 치유하시길. 그렇게 해야, 당신의 환자들도 나을 수 있으니.」 「아무도 가보지 못한 수많은 길,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생명의 섬들이 여기에 있네.」 「모든 이들의 꿈들은 각각의 대담한 범선과도 같아, 절반은 배, 절반은 폭풍이니. 그러나 난 이 곶 위에 서서 말없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가는 그대를 지켜보고 있네.」 「악마는 그대의 가죽을 벗기고, 그대의 이름도 가져가겠지. 그대가 저편에 이르렀을 때, 만물은 허무해지고, 모든 것을 얻으리니.」 「그럼 안녕, 나의 벗, 나의 적이여. 아멘.」 그렇게 그녀는 두 손을 모으더니, 그 종이마저 바다로 던져버렸다. ……이건? 셸리가 준 파우스트를 위한 추도사. 예전에 파우스트가 반쯤 농담으로, 자신을 「아틀란티스의 영원한 궁전」에 묻어달라 얘기했었나 봐. 내 생각에, 여기라면,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 아, 당연히——네가 방금까지 들고 있던 건, 그 아저씨의 뼛가루야. 야! 굳이 다시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 좋아, 이만 돌아가자——모두에게 새로운 항해 목적지를 알려줄 시간이니까.